뉴질랜드 역사 & 문화
뉴질랜드 역사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1000년경 이었으며, 그보다 2~3세기 전 일 가능성이 크다. 폴리네시아 시대 말기인 18세기에는 약 10~20만 명의 마오리족들이 남섬과 북섬에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항해가 아벨 타스만이 이끄는 탐험대가 1642년 12월 웨스틀랜드 해안을 발견하고 남섬에 상륙하려고 했지만 마오리족과 충돌이 일어났다. 1769~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남섬과 북섬 주위를 항해한 후 지도를 만들었다. 쿡 선장도 처음에는 마오리족과 충돌이 있었으나 다시 와서 접촉할 때는 보다 협조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유럽인의 초기 뉴질랜드 정착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고래잡이와 그 밖에 다른 활동들의 부산물이었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회사들이 남섬과 북섬의 해안 주위에 고래잡이 기지로 작은 부락들을 건설한 것이다. 1839~41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속해 있었다. 1840년 마오리족은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뉴질랜드의 통치권을 영국에 양도했으며 그들의 토지소유권을 보장했다. 그러나 마오리족과의 간헐적인 전투는 1847년 식민주의자들이 마오리족을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1852년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식민지는 6개 주로 나뉘고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마오리족이 중요한 땅을 팔지 않으려 하자 정착민들과 마오리족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860년 백인들이 강제로 매각한 땅에서 마오리족을 쫓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 전쟁이 일어나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영국군대와 민병대 그리고 정부 편에 선 마오리족이 연합하여 토지매각에 반대하던 부족들을 패배시켰다.
19세기 중반 금의 발견은 이 식민지에 번영을 가져왔고 그리고 더 많은 유럽인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북섬의 경제성장은 마오리 전쟁으로 지장을 받았다.
1880년대 초 냉동선 개발로 농부들이 영국으로 버터, 치즈, 육류를 출하할 수 있게 되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1970년 뉴질랜드는 대영제국 내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 받았고 1931년 자치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었으나 자치국으로서의 정식 인정은 1947년에 이루어졌다. 독립 이후 노동당과 국민당이 집권하여 왔다. 2016년 현재는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으며 존 키(John Key)가 총리를 맡고 있다
뉴질랜드 문화
뉴질랜드의 문화 환경은 복합적이다. 매우 유럽적일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민족, 특히 마오리족의 문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유럽적 생활에 동화된 반면 통가족∙사모아족을 비롯한 대다수의 태평양 도서 종족은 여전히 전통적 관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마오리족은 유럽적 환경으로의 동화 압력과 전통 문화의 보존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 왔다.
마오리족의 정치적 구조는 19세기에 대부분의 토지를 상실함으로써 약화되었고 많은 구성원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전통 종교마저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들의 문학과 예술은 구전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상당 부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특히 20세기 후반에 마오리족의 예술적 사회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각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마오리족의 춤과 노래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마오리족의 예술작품은 많은 화랑과 박물관에 전시되어 일반 대중에게 낯익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문화는 영국식 전통과 유럽 문화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온 가운데, 독창적인 문화를 구축해 왔다.
국민 대부분은 여가시간에 스포츠를 즐기는데 특히 럭비는 가장 많은 저변 인구를 갖고 있으며, 경마에 많은 인파가 몰린다. 기후와 다양한 지형의 특성상 연중 많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최근에는 ‘반지의 제왕’ 등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뉴질랜드에서 많이 촬영되어, 큰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